천안 도시철도/천안삼거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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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삼거리는 서울과 영남과 호남을 갈 수 있는 분기점으로, 여기에서 1번 국도 상행을 따라가면 성환, 오산, 수원을 거쳐 서울로, 하행을 따라가면 대전, 전주, 광주를 거쳐 목포로, 인근의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갈 수 있다. 원래 위치는 현재의 천안삼거리초등학교 인근으로 조선시대 행궁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쳐 여러 건물이 헐려 영남루만 남게 되었고, 도로를 곧게 닦는 과정에서 현재 이 역이 위치해 있는 청삼교차로(1번 국도, 21번 국도 교차)와 삼룡사거리(1번 국도, 충절로 교차) 또는 천안역(경부선, 장항선 분기)이나 천안JC(경부고속도로, 당진청주고속도로 교차, 호남고속도로천안논산고속도로가 편입됨 분기)로 역할이 옮겨졌고, 갈래도 늘어났다. 천안삼거리에 대해 얽힌 전설과 민요까지도 있으며, 천안시에서 개최하는 축제인 '천안 흥타령 춤 축제'(10월에 주로 개최한다.)에서도 이 노래를 자주 방송한다.

천안삼거리에 관한 전설 ― 능소전
조선 선조 때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도망하다 아내를 잃고 어린 일곱 살짜리 딸 능소만 데리고 천안에 흘러들어온 유봉서라는 선비가 있었다. 유봉서는 신분을 숨기고 천안 광덕산 산골짜기로 들어가 나무를 하며 살았다. 몇 년이 지난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 징집령이 내려져 유봉서는 떠나게 되었다. 어린 딸과 떨어질 수 없었던 유봉서는 딸을 데리고 천안 삼거리까지 나왔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딸을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유봉서는 떠나오면서 지팡이 삼아 꺾어 온 버들가지를 길가에 심으며 이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면 돌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잘 자라다오.라고 하며 작별하였다. 며칠 묵었던 주막집 과부 노파에게 능소를 부탁하니 노파는 영리하고 귀티 나는 능소를 수양딸로 거두었다.
능소는 점점 자라며 뽀얀 피부에 까만 눈썹, 단정한 입매가 기품 있는 반가의 처녀 자태를 보였다. 더구나 총명하고 민첩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낮에는 주모 어머니를 도와 일을 하고 밤이면 어려서 아버지께 배운 글로 책을 읽었다. 주막집은 능소의 음식 솜씨와 글솜씨로 선비들에게 소문이 자자했다. 모두들 일이 있으면 능소네 주막에서 묵어가려 하였다. 능소가 16살이 되던 초겨울의 어느 날, 문을 막 닫으려 할 때 피투성이가 된 선비가 쓰러지듯 들어왔다. 일단 사람을 살려놓고 보자고 방으로 들여 간호를 하고 보니, 비록 차림은 남루하나 진흙 속에 묻힌 보석이요, 때를 기다리는 붕새와 같았다. 정신을 차린 선비는 과거보러 가는 길에 도적을 만나 명지전과 노자를 모두 털리고 몰매를 맞았다는 사연을 늘어놓았다.
그는 전라도 고부가 고향이며 이름은 박현수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당상관을 지낸 집안의 자손이었다. 그러나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어 홀어머니와 어렵사리 살고 있었다. 마침 내년에 식년시3년마다 정기적으로 보는 과거시험를 보러 한양으로 가야 하나 노잣돈이 부족하여 고민했었다. 어머니께서 노비 문권을 주며 충주로 도망간 노비를 추노하여 오라 하였다. 박현수는 충주에 가서 노비들을 만나 잘 대접받고 후히 돈을 받았다. 그런데 그만 도적들에게 돈을 모두 털린 것이었다. 우선 몸부터 회복을 해야 할 터, 능소는 조용한 방에 박현수를 묵게 하고 탕약을 들이며 살뜰히 살펴주었다. 한가한 시간에는 요즘 읽고 있는 『통감』의 구절을 묻기도 했다. 능소는 박 선비의 해박한 지식에 놀랐다. 박 선비는 능소의 품위와 문장, 사려깊은 마음에 감탄했다. 서로의 존재에 대해 경이로워하며 둘은 사랑에 빠졌고 장래를 언약했다.
이듬해 봄이 되었다. 몸은 거의 완쾌되었다. 식년시 날짜에 대어 가려면 박 선비는 이제 한양으로 출발해야만 했다. 능소는 정성껏 지은 옷을 박 선비에게 입히고 엽전꾸러미를 봇짐에 싸 넣으며 안타까운 이별을 하였다. 아버지와 헤어진 뒤 처음 느껴 보는 행복이었다. 이제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난단 말인가. 혹여 아버지처럼 안 오시는 게 아닌가. 능소는 멀리 박 선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줄곧 쳐다보며 작별했다. 가물가물 능소의 치맛자락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박 선비는 돌아보고 또 돌아보다 맘을 다져먹고 앞으로 향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온통 능소 생각뿐이었다. 길거리의 버드나무 가지에서 우는 꾀꼬리도 능소의 울음소리처럼 들리고 스치는 바람결에도 능소 생각이 나곤 하였다. 한양에 도착하여 숙소를 정하고 지필묵을 사러 육주비전을 다니면서도 박 선비는 능소 생각만 하면 마음이 부풀었다. 하지만 박 선비는 과거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박 선비는 허탈할 뿐만 아니라 능소를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하였다. 고향에 계신 홀어머니와 능소는 북쪽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것이었다. 박 선비는 북한산, 선비들이 과거 공부방이라 하는 사찰을 찾아가 그곳 주지에게 자신의 처지를 말하였다. 주지가 박 선비를 물끄러미 한참 쳐다보더니 뒤쪽 조용한 암자로 안내하였다. 그곳의 나이 듬직한 양반에게 이 선비를 부탁하오. 하는 것이었다. 박 선비는 암자의 선비를 스승 삼아 자신이 혼자 했던 공부의 약점을 극복하려 노력했다. 밤에는 상투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책상 앞에는 송곳을 꽂아, 혹여 졸다가 머리를 끄덕이면 송곳에 이마가 찔리어 정신이 버쩍 들곤 하였다. 한편 능소는 박 선비가 떠난 후 주모 어머니와 상의해 더 이상 주막 일을 보지 않았다. 그동안 이리저리 모아놓은 돈을 고부 박 선비의 집으로 보내고 자신은 삼거리 뒤편 조용한 집에서 치산과 경영을 하며 박 선비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돌아올 때가 되어도 박 선비는 돌아오지 않았다. 능소는 하염없이 북쪽을 쳐다보며 하루하루 보내게 되었다. 그때 박 선비와 버드나무를 운자로 하여 시를 짓던 추억이 생각났다. 능소는 아버지가 심은 버드나무옆으로 죽 버드나무들을 심기 시작했다. 저 나무가 무성해지면 아버지가 돌아오신다고 하셨지. 이 나무들이 자라면 반드시 낭군도 돌아오시겠지.라고 하며. 어느덧 몇 해가 지났다. 박 선비는 내년 식년시를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주지가 숨을 헐떡이며 암자로 올라왔다. 여보게 증광시국가적 경사 등이 있을 때 비정기적으로 치르는 과거시험를 본다네. 내년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게 되었어. 박 선비는 과거장에 들어가 시제를 보니 봄날에 꾀꼬리는 울고 바람은 산들거리네.였다. 박 선비는 능소와의 만남과 이별을 시험지에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시관이 자자마다 점을 찍은 시험지를 들고 고부 통정대부 박주필 손 현수 장원이요. 하고 외쳤다.
박 선비가 삼일유가(三日遊街)를 다니니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는 보는 사람마다 감탄소리가 절로 나게 하였다. 임금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임금이 시구절의 의미를 묻자 박 선비는 자신과 능소와의 인연을 아뢰었다. 임금은 창궐하는 도적들을 회심시키고 민심을 살피라며 충청우도 암행어사를 제수했다. 능소에게 정경부인 가자를 내리셨다. 박 선비는 북한산 주지에게 아무 날 모시러 오겠다고 약조하고, 역졸들에게 아무 날 아무 시에 천안 관아로 모이게 했다. 한편으로는 고부 본가로 내려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천안으로 오게 하였다. 박 선비 자신은 단신으로 천안으로 갔다. 찢어진 갓에 허름한 옷차림으로 주막을 찾아가니 주막집 노파는 능소 신세를 망쳐놓았다고 홀대하며 능소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웃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모여들더니 쯔쯔 어쩌나 낙방했나 봐! 몇 년 만에 저 꼴로 왔어. 하며 수군거렸다. 능소는 오늘도 거리에 나가 북쪽을 쳐다보며 버드나무에 물을 주고 있었다. 아버지가 심어놓은 버드나무는 이미 울창해졌고, 자신이 심은 나무들은 제법 자라 잎사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 돌아오시며 낭군은 또 언제 오시려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멀리 주막집 근처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상해서 가보니 꿈에 그리던 낭군이 아닌가. 능소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박 선비를 집으로 데려와 목욕시키고 준비해 놓은 깨끗한 옷을 입혔다. 박 선비는 낙방하여 돌아올 면목이 없어 못 왔노라고 하였다. 능소는 “과거가 뭐 대수기에 이런 꼴로 다니셨소. 그냥 바로 오실 것을.” 하며 서운한 기색도 없이 한결 같았다. 한편 천안에선 암행어사가 출두했다는 소문이 돌아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온갖 소식이 가장 먼저 들린다는 천안 삼거리에서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풍악소리와 잡인을 물리치는 소리가 천안 삼거리에 쩌렁 쩌렁 울리더니 그 행차가 능소의 집 앞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가. 능소는 혼비백산하여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고개를 못 들고 있을 때 박 선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그 자리에서 박 선비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능소와 혼례를 올렸다. 그 광경을 본 이웃사람들은 풍악을 잡히며 흥에 겨워 어깨춤을 추니, 박 선비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천안~삼거리~흥~흥~ 능소의 버들은~흥~~ 제멋에 겨~워서~~휘늘어졌구나 흥~~. 경삿날에 부른 흥겹고 신나는 노랫가락에 지나가는 행인들도 덩실덩실 어깨를 흔들며 함께 춤을 추었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민요로 불려졌다. 능소가 심은 길가의 버드나무는 능소의 버들이라 하여 능소버들이라 하였다. 이것이 지금 능수버들이 되었다고 한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 능소의 아버지도 무사귀환한다.

뭐하지?[편집 | 원본 편집]